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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식문화관광해설사의 숨겨진 문화재를 찾아서

기사승인 2020.02.16  17:5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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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의 문인기질과 영산의 무인기질

동국여도-영남

2020년이 벌써 한달이 지나갔다. 언듯 보면 세월은 빠르게 지나가고 그냥 덧없이 흘러가는 것 같이 느껴진다. 세월은 작게는 개인의 기억속에, 크게는 집단의 기억속에 각인되어 차곡차곡 쌓여간다. 지금 우리들의 의식속에 잡리잡고 있는 기억들은 지나온 시간들의 결과물이다.

창녕사람들 중에 영창녕(靈昌寧)이란 말을 하는 하곤 한다. 영창녕의 숨은 뜻은 창녕은 영산이 먼저란 이야기다. 왜 이런 말이 생겨났을까?그 역사적인 배경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맴돌았다.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고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역사에 정답은 없지만 말이다.

○ 창녕사람과 영산사람의 문화와 기질

일반적으로 창녕현은 문인기질이 있다고 하고, 영산현은 무인기질이 있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창녕군(현)과 영산군(현)은 이웃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와 기질로 살아왔다.

영창녕에 대한 기록은 역사서나 군현지(郡縣誌)에는 없다. 하지만 옛 역사적 사건을 되돌아 봄으로써 어렴풋이 그 원인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창녕현은 무오사화 때 대학자 환훤당 김굉필선생의 차남 김언상(金彦庠)이 창녕현 고암면 계팔로 피신한 사건, 창녕현감으로 재직한 한강 정구선생이 흥학교민을 위한 8개의 학교 설립, 현감 정동기와 이성순의 이문재를 세우고 학문을 일으킨 흥학비등이 있어 문인기질의 일단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반면 영산현은 고려말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빈번하였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조선초기 영산읍성을 쌓았다. 영산현 길곡면 밀포나루(현 창녕함안보)에서 낭장 신사천이 왜구와 싸우다 딸과함께 죽었다. 도천면에 「열효신씨 정려비」가 그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민관(民官)이 단결하여 왜구와 싸우며 자연스럽게 무인적 기질이 형성되지 않았다 추청해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의병활동과 삼일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앞장선 것은 그 무인기질이 발휘된 예라 볼 수 있다.

○ 국가형성 과정에서 생긴 지역 간 갈등의 원인

신석기시대를 거처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하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부족(씨족)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그러다 힘센 부족이 이웃부족을 정복하며 기원전후로 원삼국시대로 발전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는 고대기록은 없다. 다만 중국 측 중국 역사서 진(晉)나라 진수(陳壽/233~297)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 조에 나온다.

마한은 54국이며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 있었다. 큰 나라는 만(萬) 여가(家) 정도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數千家) 정도이다. 총 10여만 호 정도이다.

변진과 진한 합하여 24국이며 경상도 지역이다. 큰 나라는 4~5천가이고 작은 나라는 6~7백가이니, 총 4~5만호이다. 12국은 진왕에게 속한다.

진한과 변한의 인구를 보면 대국(大國)은 4~5,000가(家), 소국(小國) 6~700가가 이며 총 4~5만호로 기록하고 있다.

1가구(家)를 5명으로 잡으면 큰 나라는 20,000~25,000명, 작은 나라는 3,000~3,500명이다.

각자 소국들의 크기는 지금의 시, 군 한두 개로 크봐야 몇 개 정도 묶어놓은 수준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대로 된 국가라기보다는 성읍 국가나 지역들의 연맹체에 가까운 형태이었다.

연맹 내부의 국가들끼리는 서로 싸우기도 했다. 「포상팔국의 난」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원삼국시대의 삼한이 생겨난 시기는 한국사판 춘추시대라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진한과 변한은 서로 거의 비슷한 문화 양식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어 명확한 구분도 불가능하다.

3세기에 접어들면서 대체적으로 마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 변한은 가야로 발전한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고대 작은 마을→큰 마을→작은 고을→큰 고을로 통합되며 국가로 발전한다. 물리적 통합은 빨리 일어나지만 문화와 기질등 화학적 결합은 오랜 세월이 걸리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정복자와 피정복자간의 갈등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문화와 문화의 충돌, 기질과 기질의 충돌은 지역 간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 창녕과 영산의 고대사회 발전과정

대체적으로 창녕군 고대국가는 원삼국시대에 북부(창녕, 현풍)의 불사국(不斯國)과 남부(영산, 계성) 탁기탄국(啄己呑國)으로 비정한다.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청동기→불사국→비화가야→비사벌군(신라)→화왕군(고려)→창녕현․군(조선)→창녕군(대한민국), 청동기→탁기탄국→상약현(신라)→서화현(고려)→영산현․군(조선)→1914년 창녕군에 합속→영산면(대한민국)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조선 통치의 효율화를 위해 1914년 4월 1일자로 전국에 걸친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다. 그 때 영산군이 영산면으로 강등되고 창녕군에 합해졌다. 지금으로부터 106년 전이다.

○ 조선시대 창녕현과 영산현 비교

나이 드신 분들이 조선시대에는 영산현이 창녕현보다 면수(面數)와 인구(人口)가 더 많았다는 말을 한다. 그래서 호기심이 발동하여 고지도(古地圖)를 분석하여 창녕현과 영산현의 면(面)의 수, 인구수, 토지등을 비교해 보았다.

위 표를 보면 창녕현은 11~14개면(個面), 영산현은 7~8개면(個面)이다.

가구 수는 창녕현 6,432호~9,559호, 영산현 4,208~5,109호이다.

인구수는 창녕현 25,989명~28,073명, 영산현 19,353명~22,924명이다.

창녕현이 면수가 4~6개 더 많고, 가구 수는 2224~4450호가 많았다. 인구수는 5,149~6,636명이 더 많았다. 영산현이 창녕현보다 큰 고을 이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옛 영산현 사람들의 의식속에 깔려있다.

○ 광해군복위운동

창녕군지에는 창녕현이 폐현되는「성지도(成至道)의 역변(逆變)」이라는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 사실은 이렇다. 광해군 15년(1623년) 서인 일파(西人 一派)가 남인의 묵인 하에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 파를 몰아내고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세운 인조반정이 일으킨다.

이 반정으로 당시 집권당인 북인(대북(大北)) 내암 정인홍이 사형을 당하고, 대대적인 숙청이 일어나 대북파는 큰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인조9년(1631) 광해군 복위운동의 실패로 영남일대 대북파는 사실상 몰락한다.

불의가 정의를 이긴 역사는 숱하게 많다. 전쟁에서 이기면 충신(영웅)이요 지면 역적이란 말이 있다. 힘의 논리인 셈이다.

성지도의 역변도 광해군의 복위운동이다. 인조와 서인정권에게는 역변일지 몰라도 광해군 입장에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우기위한 일이었다.

뒤집어 보면 인조반정은 성공한 역모사건에 다름 아니다.

복위운동의 실패로 인조의 서슬 퍼런 칼날을 피해 성지도 가문에서는 황급히 호적에 삭제하고 흔적을 없앨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왕조시대 역적이란 프레임으로 씌워지면 당사자와 가문은 멸문지화를 입는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족보에서 삭제하고, 새로 족보를 만드는 족보세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창녕 현이 혁파되어 영산 현에 합속되어 버렸다. 6년 후에야 어영군의 상언으로 인조 15년(1637년) 복현(復縣)되었다.

당대의 승자라 모두 해서 정의라 볼 수 없다. 긴 역사로 보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 반정으로 쫓겨난 왕을 다시 복원시키려는 것은 역적(逆賊)이 아닌 충신(忠臣)이다.

옛 역사를 보면 군현(郡縣)을 혁파하여 합속시키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역모죄(逆謀罪)나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어기는 강상죄(綱常罪)를 범하면 군현이 혁파되고 이웃 군현으로 합속된다.

○ 창녕고을과 영산고을

기록으로 보면 창녕현이 영산현보다 큰 고을 이였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런데 영창녕 즉 영산이 더 컸다는 인식이 생기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

인조때 창녕현이 영산현의 속현이 된 사건, 임진왜란 때 활발한 의병활동, 일제강점기에는 경남최초로 삼일운동등 역사적 사건으로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해방 후 1961년부터 영산면을 주축으로 시작된 영산삼일민속문화제는 영산사람들의 단결심과 자부심을 크게 고취시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무인기질이 강한 영산사람들이 일제강점기 영산군이 없어지고 영산면으로 강등되면서 무너진 자존심등 여러 요인 등으로 의식 속에 창녕보다 영산이 더 큰 고을 이였다고 느껴지는 것을 아닐까 여겨진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영산현(군)이 영산면으로 강등되고 창녕군으로 합속된지 106년째 이다. 일반적으로 왕조가 바뀌거나 군현이 통합되고 난 후 100여년은 그 앞 왕조, 군현의 풍습이 유지된다고 한다. 그래서 지역 간 다른 문화와 기질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100년은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면 삼대(三代)에 해당된다. 삼대를 지나야 새로운 풍습, 기질 등이 자연스럽게 융합된다고 한다.

이런 갈등의 문제는 우리지역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합천군, 의령군, 함안군등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긴 역사로 볼 때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한 순간이다. 시대정신을 정확히 알고 지역공동체를 위해 자기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많은 따뜻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비사벌뉴스 bsb27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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