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오종식 문화관광해설사의 숨겨진 문화재를 찾아서(73회)

기사승인 2021.04.29  10:01:22

공유
default_news_ad1

- 낙동강 물길 따라(백산나루-창나루(기강나루))

이 기사는 「2021년 경상남도의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기획취재 지원 사업」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소금배가 정박하였던 박진나루

박진나루는 창녕박진에서 의령군 부림면 박진으로 통하는 길이다. 강 양편모두 박진이라 불렀는데 이를 구분키 위해 남지읍 쪽의 박진을 좌두박진이라 하고 의령군 쪽 박진을 우두박진이라 한다.

큰 나루터로 하류에서 올라오는 소금배, 생선과 젓갈배가 정박하였던 곳이다. 항상 사람들이 북적였고 강 건너 의령 강변에 옹기굴이 있어 옹기와 신반 한지(韓紙) 거래도 활발하였다고 한다. 의령 신반은 한지의 주생산지로 외지사람들이 의령은 몰라도 신반은 알정도로 유명했다.

이 나루터는『대동지지』, 『창녕현읍지』 등에 박지곡진으로 기록되어 있는 오랜 나루터로 신라시대 이후 경주-창녕에서 의령, 진주 등지로 통하였던 주요한 나루였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의병군이 이 나루를 방어하여 왜군병선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강물 속에 말뚝을 박아 배가 걸리면 불화살을 쏘아 불태웠다.

1990년대 낙동강연안개발 추진으로 박진교가 건설되고 월하제방 공사로 마을이 철거되어 나루터의 모습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1999년 1008번 지방도로 확장과 박진나루터에 박진교가 만들어져 교통이 편리해 졌다. 옛 정취와 추억은 그 시절을 경험한 사람들의 가슴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 백산나루

낙동강이 의령으로 굽이쳐 흘러 남지읍 대곡, 반포, 칠원 마을 앞에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백산나루는 의령군 지정면 유곡리 백산마을에서 남지읍 대곡, 반포로 건너던 작은 나루터다. 대곡마을에서 강 쪽 멀리 오래된 소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있다. 강변에 있는 고목들은 옛나루터가 있었다는 뜻이다.

백산마을의 지명은 뒷산 유곡산성이 있어 잣뫼가 성산(城山)이 아닌 백산(柏山)으로 불린 것이다.

박진나루와 백산나루는 지척간인데 근처 3km 거리에 부림면 입산(설뫼)마을 백산 안희재선생과 의병장 곽재우 장군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옛 물길중심의 나루터는 신문물과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어쩌면 안희재선생 호 백산과 백산나루의 명칭이 같은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

○ 남일장(南日場)과 고을터

박진나루와 백산나루는 큰 배가 정박하여 물건이 거래되는 큰 강변장터가 있었을 것이다. 장터 주변에는 객줏집, 주막등과 마을이 형성됐다.

강 상·하류를 다니던 배들이 이곳에 닻을 내리는 선창이 있었을 것이고, 각종 물건을 사고 파는 장터가 있어 남일 장터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5일장이란 형태의 재래시장이 서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이전부터였으니 이곳에 장이 섰던 것은 아마 신라 때가 아니었는가 추측한다.

신라 때 박지곡진(朴只谷津)이 있어 경주에서 서쪽으로 진주 등 경상도의 서부나 백제로 가는 교통로이었으며, 강을 통한 물자의 수송도 용이하였으므로 이곳에 장이 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 장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구전될 뿐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남일 장 일대에는 큰 고을이 있었다 한다.

월하 동편에 들판이 넓으니 산자락과 강 사이에 마을이 있어 경주 - 창녕 - 의령 - 진주를 이었을 것이나 신라가 망한 후에 도읍이 개성으로 가면서 경주로 통하는 길이 필요 없게 됨에 따라 이곳도 쇠퇴하였을 것이다.(참고 : 창녕지명사)

 

백사장은 건조하고 척박하여 밀, 호밀, 채소 등을 재배했다.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이제 억새, 망초, 개망초, 달맞이꽃등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강변 포구마을도 제방을 쌓으면서 밀려나 옛 정취는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 창나루(倉津, 創津, 기강나루)와 남지개비리길

창나루는 용산(알개실)마을 입구에 있었는데 옛지명은 기음강(岐音江)나루, 가야진으로 불리었다. 지금은 창나루, 창나리, 기강나루로도 불린다.

이 나루터에는 창고가 있어 ‘창고가 있는 나루‘ 곧 창날, 한자로 쓰기는 창진(倉津)이라 했다 하며, 다른 하나는 이곳 지형이 강을 향해 창처럼 생겨서 창진(槍津)이라 했다. 둑이 있기 전에 강물이 마을 앞으로 흘렀고 나루터도 마을 산자락에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은 남강의 끝이며 창녕, 함안, 의령 3개 군이 만나는 경계점이다.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지점으로 고지도에 기음강(岐音江)으로 표기되어 있다.

남지읍 용산마을과 강 건너 함안군 대산면 장암,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사람들이 오고 가던 물길이었다.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에서는 기강도선장(岐江渡船場)으로 불렀다.

임진왜란 때 남강을 따라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왜군을 곽재우 의병장이 육지전투의 첫 전승지인 기강전투로 유명하다. 강 건너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남강 변에는 곽재우 장군의 전승을 기념하는 보덕각(報德閣)과 의병장 손인갑 장군 부자(父子)를 기리는 쌍절각(雙節閣)이 있다.

근처 오천리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과 함께 싸운 식성군 이운용(息城君 李雲龍) 장군의 묘소와 이운룡장군의 위패를 모신 기강서원이 있다. 이운룡장군은 임진왜란 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냈다.

한국전쟁(6.25) 때 어네스트 R 코우마 상사의 전공을 기리는 안내판이 2020년 설치되어 개비리길 탐방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코우마상사는 전차지휘관으로 퍼싱 전차 1대로 강을 건너오는 북한군을 저지한 영웅적인 활약을 한 사람이다.

이렇듯 옛 조상들의 혼이 서린 이곳에 보름날에 남강에 어리는 월주(月柱)를 보며 옛 조상들의 넋을 기리고 풍류를 읊던 곳이다.

이 나루를 건너면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이다. 지금은 강을 다니던 나룻배는 없어졌고, 나루터와 주막집도 사라졌으며, 1990년대에 제방이 생겼고, 4대강공사로 억새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비사벌뉴스 bsb2718@hanmail.net

<저작권자 © 비사벌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