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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식문화관광해설사의 숨겨진 문화재를 찾아서(74회)

기사승인 2021.05.08  09: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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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현감 송덕비

○ 영산현감 석비군 송덕비

현감숫자

만기교체

사직

파직

성적최하

기록 없음

기타(병,조난,미귀환)

130

57

16

25

17

9

6

창녕군지 역대 현감과 군수를 기록한 환적(宦蹟)편에 보면 영산현의 고을 수령은 모두 130명이다. 성종 14년(1483년)부터 순종 3년(1909년)까지 426년간이다. 1392년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92년간의 기록은 빠진 셈이다.

정상적인 임기를 마친 현감은 57명으로 44%정도다. 지방관은 행정․사법․군사권등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백성들을 수탈하며 못살게 구는 경우가 허다했다. 조정에서는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등 관리감독을 위해 노력 했으나 역부족 이였다.

영산군․현에 재직한 현감 및 군수들 130중 22명이 백성을 사랑하고 선정을 베풀었다는 선정비가 서있다. 22기 선정비 중에 백성들이 마음에 우러나서 세운 비는 몇기나 될까 ? 22명의 현감 자료를 찾아 나섰다.

순청 팔마비

○ 송덕비(頌德碑)

공덕을 칭송하는 문자를 새긴 비(碑)를 말한다. 공덕을 칭송하는 선정비(善政碑), 백성에게 사랑의 베풀었다는 유애비(遺愛碑), 공적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영세불망비등은 모두 송덕비의 종류다.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모범을 보이는 등 어진 정치를 펼친 관료의 공을 기리기 위해 고을 사람들이 세우는 비다.

비(碑)는 주사(州司, 고려·조선 시대 향리들이 모여 고을의 사무를 처리하던 곳)가 관료가 세운 공을 심사한 후 왕의 허가를 받아 세웠다. 그러나 일부 관료들은 백성을 수탈하거나 자비를 들여 세웠다.

송덕의 뜻을 가진 비는 유애비(遺愛碑)·기공비(紀功碑)·순절비(殉節碑)·충렬비(忠烈碑)·관개비(灌漑碑)·정충단비(旌忠壇碑)·대첩비(大捷碑)·순교비(殉敎碑)·전승기적비(戰勝紀蹟碑) 등을 들 수 있다.

우리 민족에게 치욕적인 외적의 기공비로 고구려 고토인 집안현(集安縣)에 위(魏)나라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 부여에 당나라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 서울에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가 있다.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좌수영대첩비(左水營大捷碑)·행주전승비(幸州戰勝碑)·금려기전승비(金礪紀戰勝碑)·오명항토적송공비(吳命恒討賊頌功碑) 등은 모두 전공을 기린 비들이다.

구일관개비(具鎰灌漑碑)는 선정비이며, 김상용순의비(金尙容殉義碑)·김경조순의비(金慶祚殉義碑) 등은 송덕의 뜻과 아울러 유지(遺趾)를 알리는 두 가지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 송덕비의 범위는 광범위하다.

○ 선정비의 시초 순천 팔마비(順天 八馬碑)

순천시를 처음 방문한 나에게 “팔마”라는 생소한 명칭이 눈에 들어왔다. 팔마초등학교, 팔마중학교, 팔마고등학교, 팔마체육관등 순천 사람들이 팔마라는 단어를 왜 쓰고 좋아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팔마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다음에 검색해 보니 팔마는 8마리 말을 말하며 「팔마비(八馬碑)」에서 나온 말이였다.

순천 팔마비는 고려시대 충렬왕 7년인 1281년 이후에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崔碩)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승평부(지금의 순천)에 세운 비석이다. 이 비는 현재 전남 순천시 영동 우리은행(구 승주군청) 앞 도로변에 있다.

이 비 건립 배경은『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와 있다. 『고려사』권34의 열전 최석(崔碩)에 따르면,

승평부(현 순천)는 관리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면 증마(贈馬, 말을 바치는 것)라 하여 태수는 말 8필, 부사(副使) 7필, 그리고 법조(法曹, 고려시대 8품 이상의 외관직(外官職))는 6필을 주되 마음대로 고르게 했다.

최석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말을 바치고 좋은 것 고르기를 청하였다. 최석이 웃으며 “능히 서울에만 이르면 족할 것이거늘 말을 골라서 무엇 하겠는가.”라 하며 서울로 돌아간 뒤 말들을 되돌려 보냈다.

고을사람들이 받지 않자 최석이 “내가 그대들 고을에 수령으로 가서 말이 망아지를 낳은 것을 데리고 온 것도 이는 나의 탐욕이 된다. 그대들이 지금 받지 않는 것은 아마 내가 탐을 내서 겉으로만 사양하는 줄로 알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낳은 망아지까지 돌려주었다.(모두 9필)

이 일로 증마(贈馬)의 폐단이 없어져 고을 백성들이 그 덕을 칭송해 비를 세우고 팔마비라 했다. 이 아름다운 최석의 이야기가 오늘까지 순천지역에 알려진 팔마비의 유래며, 대한한국의 역사상 지방관의 선정 겸 청덕비의 효시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의가 있다.

팔마비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에서 2021년에 국가문화재 보물 제2122호’로 승격됐다.

○ 감사는 평양감사, 현감은 과천현감

영산석비군

감사는 평양감사, 현감은 과천현감이란 말이 있다. 조선시대 평양감사와 과천현감이 제일 좋은 자리라는 뜻이다. 또 많은 고을 수령들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선호했다. 그 이유는 많은 재물을 수탈하기 좋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과천현감 송덕비 이야기다. 조선시대 지방 수령 중에 과천 현감은 서울이 가깝고 오가는 고관을 접촉하기 쉬웠다. 또 세금징수가 많기 때문에 재물을 모아 뇌물을 상납하여 조정의 좋은 자리로 영전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어느 해 과천 현감이 영전하여 서울로 떠나게 되자 아전들이 송덕비를 세우겠다며 비문을 어떻게 할까 문의했다. 그러자 현감이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여 아전들이 남태령에 송덕비를 세우고 현감에게 제막식을 하고 가시라고 했다.

현감이 잠시 행렬을 멈추고 천을 벗겨본 비문에는

“今日送此盜(금일송차도, 오늘 이 도둑놈을 보내노라)라고 쓰여 있다. 현감이 껄껄 한 번 웃고 그 옆에 한 줄 더 쓴다.

“明日來他賊(명일래타적, 내일 다른 도둑놈이 올 터인데)...현감이 떠나자 아전이 또 한 줄을 보태 쓰는데

“此盜來不盡(차도래부진, 도둑놈들만 끝없이 오는구나)...지나가던 행인이 보고 또 한 줄을 더 보태어 써서

"擧世皆爲盜(거세개위도, 세상에 모두 도둑놈뿐이구나)...이렇게 비문이 완성됐다고 한다.

○ 선정비 금지령과 매관매직

창녕석비군

선정비는 고을 수령이 백성을 위해 선한 정치를 베푼 것을 기리며 세우는데, 실제 수령의 요구로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고을 유지를 겁박하거나 입비전(立碑錢, 비석을 세우는데 필요한 돈)을 거두는 등 백성을 수탈하는 일이 일이 많았다. 현종 3년(1662), 현종 5년(1665), 숙종 10년(1684), 거짓 선정비를 세우지 않아야 폐단이 없어진다는 함경감사 박문수의 건의로 영조 42년(1766)등 4차례 선정비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선정비와 불망비는 세도정치가 자리 잡은 헌종 이후 훨씬 많이 세워진다. 특히 조선 말 고종 대에 지금 남아있는 선정비의 절반이 세워졌다.

선정비는 수령이 떠날 때 마음을 담아 세우는데 재임 시에 비를 세우다 보니 강압에 의한 것이 많았다.

또 수산(繡傘, 수를 놓은 양산)이라 하여 수령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비단에 사람들의 이름을 수놓아 선물한 양산이다. 행렬의 위상을 나타내는 의장의 하나로 19세기에 고을 사람들의 이름은 많이 넣어 천인산(千人傘), 만인산(萬人傘)을 만드는 풍조가 생겨났다.

선정비가 많았던 시기에 오히려 정치가 어지러웠고, 칭송이 높을 때 오히려 백성의 원성이 높았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세도정치가 시작됐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 시대에 지방관직의 거래와 관직을 돈으로 산 수령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늘어났다. 그리고 고종 10년 친정(親政)을 시작하고 민비의 외척이 권력을 휘두르며 매관매직이 극심했다.

민씨 일족은 나라 재정을 함부로 쓰고, 국고가 고갈되자 과거 합격과 품계, 관직까지 공공연히 돈을 받고 팔았다. 그리고 핵심 관직은 민비의 출신인 노론에만 맡겼다.

을사조약 때 자결한 광양선비 매천 황헌(1855-1910)은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 당시 관리 인사의 부패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매번 수령을 교체할 때는 임시 직함을 어느 정도 판 다음, 실재 직함을 팔았다. 감사와 유수 자리는 엽전 100만 꾸러미요, 초시(처음 하는 낮은 벼슬)는 5천~1만 꾸러미였다.

과거 급제의 경우 대과는 5만~10만 꾸러미이고, 생원시 같은 소과의 경우 2만~3만 꾸러미로 등급에 따라 가격이 달랐다.

차함(실제로 근무하지 않고 벼슬 이름만 가지던 일) 또한 2만~3만 꾸러미를 호가했고, 증직(죽은 뒤 벼슬을 내려주던 일)과 정려(충신, 열녀 등으로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던 일)는 수천 꾸러미를 호가했다.

매관매직 정도가 가히 부패의 결정판 이였다.

(다음호에 계속)

비사벌뉴스 bsb27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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