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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우포어부의 작업공간을 보존하자

기사승인 2021.09.09  20: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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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점석(경남람사르환경재단)

“고기잡이를 얼마나 하셨습니까?”

“오래했지.”

“대충 50년 정도 됩니까?”

“스무 살 때부터 했지.”

“그럼 60년입니까?”

“그렇지.”

창녕군 이방면 장재마을에 사셨던 오춘길 선생님과 지난 7월 30일에 나눈 대화다.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기억이 또렷했다. 60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매일 우포를 다니면서도 새들을 찾아다니느라고, 예쁜 연꽃을 보느라고 정신이 팔려서 정작 사람을 보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오 선생님은 1941년생이니까 올해가 만 80세이다. 1남 7녀 중에서 셋째이고, 3대 독자 외동아들로 태어났으나 가난하게 자랐다. 이방초등학교를 다니긴 했으나 어린 나이에 일찍 생업에 뛰어들어 누구보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았다. 이때는 현재 창고 앞쪽에 초가집이 있었다. 16살 때는 한자를 가르쳐준다고 해서 옆 동네에서 머슴살이를 하기도 했다. 겨울에는 얼어있는 우포 건너편 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6.25전쟁 때에 솥을 갖고 밀양, 청도 등으로 피난을 하면서 온갖 고생을 했다. 돌아와 보니 집이 불타고 없어서 나무에 비닐을 둘러서 임시 방을 만들어 한동안 머물기도 했다. 고기를 잡으면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읍내에 나가서 팔았고, 누이동생들은 말밤을 삶아서 읍내 장날에 팔기도 했다. 한창 고기를 잡을 때는 매일 새벽 어두울 때에 나가서 9시가 넘어서야 집에 와서 아침밥을 먹었다. 어떨 때는 물가로 밥을 가져다 줄 때도 있었다. 사모님은 욕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도 욕을 하기 시작하면 버릇된다고 못하게 했다. 가정에서도 언짢은 일이 있으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스스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들어왔다. 장재마을은 본래 노씨 집성촌이었다. 타성은 우체부 했던 오태환씨와 두 명뿐이었는데 텃세가 꽤 심했다. 그러나 오 선생님은 동네 이장도 오래 했고, 새마을회 활동도 열심히 했다. 경화회 성창경 상무는 점잖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신 분이었다고 했다. 경화회 감사, 1996년 편집위원 직책을 맡기도 했고, 10여 년 전에는 경화회 이방면 대표(면책임자)를 오래 맡으면서 30여 명의 회원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2남 4녀의 자제분들은 모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진주, 창원 등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고기 잡는 일, 농사일은 아예 시키지 않고, 일찍이 마산, 진주로 유학을 보냈다. 오 선생님 부부는 바쁘니까 모친께서 손주들의 학교 뒷바라지를 모두 했다. 그 중에 넷째인 딸이 진주 경상대학병원에 근무하는데 지난 8월 11일, 숨이 차서 입원했다가 불과 이틀 지난 13일, 돌아가셨다. 오 선생님 집은 내가 머물고 있는 우포고요펜션과 마주 보고 있다. 불과 30여 미터 떨어져 있다. 골목에 접해있는 벽에는 ‘우포 자연산 붕어와 잉어를 직접 어획하여 판매합니다’라는 글씨와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동네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글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자그마한 마당에 평상과 비닐 햇빛가림막이 있다. 오른쪽에는 여러 가지 공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왼쪽에 있는 방에 주로 계셨다. 방문 앞에는 작품 사진 3장이 걸려 있다. 모두 새벽에 쪽배를 타고 우포에서 고기를 잡는 모습이다. 새벽안개 속에서 장대를 들고 서있거나 통발에서 고기를 끄집어내고 있다. 마을회관 옆에도 한 장 걸려 있다.

7년 전에 진단을 받은 후 지난해 10월에 악화되어서 특발성폐섬유화증으로 수술을 한 이후로 호흡이 힘들었다. 병원에서는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했다. 이 병은 치료제도 없는 난치병이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납중독일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오랫동안 그물을 만들 때 추로 사용하는 납을 손으로 만지고, 그 손으로 식사를 했었다. 겨울에는 밀폐된 공간에서도 했다. 최근에는 폐기능이 불과 20%였다. 그래서 방에 있는 게 답답하여 주로 밖에 나와 계셨다. 8월 초에는 집 앞의 우포고요 주차장에 있는 큰 나무 옆에 깔개를 갖고 오셔서 누워있었다. 벼게는 화장지 통으로 직접 만든 것이었다. 누워계신 곳이 고개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바람 길이어서 시원하였다. 나도 매일 퇴근하면 차를 이곳에 세우는데 8월 4일에 또 만났다. 누워계시다가 내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집으로 가시기 위해 일어서셨다. 그리고 선 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청년 시절에는 주로 가래로 고기를 잡았는데 한 번에 서너 마리씩 손으로 끄집어내기도 했다. 길이가 긴 가래도 있었다. 집 주위에 대나무가 많아서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잘라서 직접 만들어 썼다. 삼각망도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나일론 그물이 나오기 전에는 명주실을 사용했다. 인근의 누에치는 분들에게서 실을 사 갖고 와서 직접 그물을 짰는데 조금 사용하면 끊어지고, 틑어져서 자주 고쳐야 했다. 그런데 훨씬 질긴 나일론 그물이 개발되어 굉장히 편리했다. 나일론 그물 한 필을 사서 반 필로 가로망을 만들고, 나머지 반 필로 삼각형을 만드는 식이다. 의외로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나일론 그물을 일일이 노끈으로 꿰고, 추를 달아야 물속에서 제대로 그물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만드실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평생 하던 일인데 쉽다고 하셨다. 재료비가 많이 드느냐고 하니까 몇 푼 들지 않는다고 하셔서 그럼 날 잡아서 같이 해보기로 약속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난 뒤에 며칠 동안 주차장에서 뵙지를 못했다. 여전히 깔개와 벼게만 나무 옆에 놓여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깔개 위에 쌓였다. 나는 오 선생님이 오시면 언제든 누워서 쉴 수 있도록 4~5일간 매일 혼자서 나뭇잎을 치우고 청소를 했다. 그런데 8월 15일, 일요일이었다. 오전에 읍내 마트에서 물건을 사시는 사모님을 만났더니 돌아가셨다고 했다. 오후에 집으로 왔더니 평소 보이지 않던 7~8대의 승용차가 동네 어귀에 세워져 있었다. 뒤늦게 도착하신 분이 차에서 내려 오 선생님 집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출상을 물었더니 오늘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자신은 둘째 사위인데 서울에서 급히 내려왔다고 했다. 우리은행 지점장을 하다가 정년퇴직하신 분이다. 장지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소목마을에 있는 자그마한 땅에 평장으로 모셨다고 했다. 나는 “오 선생님처럼 60년 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고기잡이 하시면서 우포와 함께 사신 분이 많지 않은데 조금 더 사시면서 그동안 살아오신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했더니 집 앞에 있는 창고로 같이 가자고 했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창고는 벽체도 없이 나무 기둥과 철망으로 얼기설기 엮어 놓았는데 안에는 농기구와 온갖 도구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입구를 들어서니 오른쪽에 커다란 어항이 3개 있었다. 각각 붕어, 잉어, 빠가사리를 넣었다. 조립식 판넬과 피브이로 직접 만드신 것인데 우포에서 고기를 잡으면 이곳에 담아두면서 팔았다고 했다. 어항 주변에는 저울과 산소통이 세워져 있었다. 그 외에 대나무로 직접 만든 가래와 크고 작은 뜰채가 세워져 있었다. 이번에는 창고 뒤쪽으로 갔다. 주민들이 다니는 길은 아니다. 뒤쪽에는 60여 평 정도의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은 본래 개인 소유의 밭이었는데 오 선생님이 연못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어린 물고기는 이 연못에서 키워서 팔았던 것이다. 이 연못을 어장이라고 불렀다. 임자 잃은 어장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냥 옆에 있는 논에 물 대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사연을 듣고 보니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이 동네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자그마한 설명판이라도 세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장을 둘러보고 나서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자그마한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둥근 지붕을 대나무와 비닐로 만들었는데 8평 정도의 크기이다. 신기한 새로운 세상이 있을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전기장판이 한 장 깔려 있고, 만들다가 남은 그물과 노끈, 각종 도구들이 작은 바구니에 담긴 채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생전에 오 선생님이 그물 손질을 하던 작업공간이다. 추운 한겨울에도 작업하기 위해서 만든 곳이다. 세세하게 얽혀있는 그물의 한줄 한 줄을 손으로 잡고서 작업을 하고 있는 오 선생님이 앉아 계시는 것 같았다. 사모님도 거들었다고 한다.

만약 이곳을 지금 현재의 모습대로 보존한다면 보는 사람들이 누구나 우포 어부의 삶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제자리에 놓여 있는 어구가 보여주는, 들려주는 어부들의 일상생활이 우리들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다양한 어구들을 현장에서 가져와서 멋진 콘크리트 건물의 전시관, 박물관에 따뜻한 온기도 없이 창백하게 전시해놓는 것보다 훨씬 생생하다. 어부의 체취가 묻어 있는 이곳이야말로 살아있는 삶의 현장으로 보존할 보물이다.

80 평생에 60년을 우포와 함께 사셨던 오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비사벌뉴스 bsb27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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