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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新作路)의 추억

기사승인 2021.12.25  07:2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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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고 자란 고향 창녕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대구와 창원, 밀양 같은 크고 작은 도회지에 둘러싸인 육지의 섬이다.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고 싶어 하는 은퇴자와 농사를 지어보겠다며 희망찬 포부를 안고 귀농을 꿈꾸는 청장년들이 즐겨 찾는 한적한 시골이다.

일제는 당시 대구와 창녕, 마산과 부산을 잇는 철로를 부설하려고 계획했다. 하지만 그 꿈은 지역유림의 반발로 수포가 되었다. 양반 고을에 철길을 놓고 시커먼 연기 내뿜으며 굉음을 지르고 달리는 열차를 지켜보고 있을 수 없다는 게 반대이유였다. 따라서 철길은 밀양과 삼랑진을 거쳐 부산을 잇는 경부선과 진주로 향하는 경전선으로 나뉘어 건설되었다. 대신, 마산에서 출발해 창녕과 대구, 안동을 거쳐 원주와 춘천을 가로질러 중강진까지 연결하는 신작로(新作路) 즉, 국도 5호선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일제는 조선에서 수확한 각종 농작물과 철광석, 무연탄 등 지하자원을 공출이란, 명분으로 수탈하고, 만주정벌을 위해 철길을 놓고 신작로를 닦았다. 그때 건설된 철로가 경인선, 경부선 그리고 경의선이다. 또, 우마차가 다니던 좁다란 길을 넓히고 다리를 놓아 신작로를 건설했다. 그 길을 우리는 국도라 부른다. 신의주에서 평양과 서울을 거쳐 목포까지 이어진 국도 1호선과 남해에서 진주, 문경, 서울과 철원을 지나 평안북도 초산까지 연결된 국도 3호선, 마산에서 시작, 대구와 안동, 원주, 춘천을 거쳐 중강진까지 국토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국도 5호선 그리고 부산에서 울산, 강릉, 원산, 함흥을 거슬러 온성까지 오르는 동해안 바닷길을 국도 7호선이라 한다. 그밖에도 한반도의 동과 서를 이어주는 국도 2호선(목포-부산)과 4호선(군산-경주), 6호선(인천-서울-강릉) 등 짝수 번호를 붙인 주요 도로가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창녕은 국도 5호선이 지나는 길목이라 교통의 요지라 할 수 있다. 사통팔달로 뻗은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전까지, 합천과 거창 등 인근 지역민들이 대구나 부산을 여행하려면 반드시 창녕을 거쳐 가야 했다. 국도와 연결된 지방도로도 그때 함께 건설되었다. 따라서 국도와 지방도가 교행 하는 곳에 있는 우리 마을 사람들은 큰비가 오면 어김없이 도로보수에 나서야 했다. 말이 신작로지, 비포장 자갈길이라 비가 내린 뒤에는 곳곳이 분화구처럼 파여 물웅덩이가 생겼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 청룡열차를 탄 것처럼 온몸이 흔들리고 멀미가 났다. 따라서 관청에서는 주민들을 동원해 도로보수를 하게 했다. 일손 부족으로 부역(賦役)에 빠지는 집은 벌금을 내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뒤로 우리 집은 벌금을 내지 않아도 됐다. 내가 부역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파인 도로에 흙과 자갈을 메우고 다지는 일은 단순한 노동이지만, 초등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하지만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고 책임 구역을 완수하려고 노력했다. 간간이 빨간색 완행버스가 지나갈 때는 손을 흔들며 반겼다. 하지만 연분홍 바탕에 초록색 줄을 두른 직행버스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올 때는 하던 일을 멈추고 가장자리로 비껴야 했다. 대처로 여행하는 꿈을 꾸며 간식으로 싸 온 빵과 사이다를 먹었던 오래전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가로수는 열병식에 참가한 병사들처럼 두 줄을 지어 멋진 모습을 연출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연록의 잎새들이 하늘거리던 봄. 검푸른 녹음으로 그늘을 만들어 땀을 식혀주던 여름, 샛노란 단풍으로 볼거리를 제공해 주던 가을, 벌거벗은 몸으로 희망의 새봄을 기다리는 겨울나무.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그때 그 키 큰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던 가로수 길이 그립고 보고프다.

읍내로 통근하시던 아버지가 페달을 밟으며 오르시던 길이 신작로이며, 꾹꾹 눌러 담은 양파 무게를 이기지 못해 헐떡거리며 기어가는 화물차 꽁무니에 매달려 배웅했던(?) 개구쟁이 시절의 추억이 반세기가 지나도 생생하다. 외할머니의 길동무가 돼 준 코스모스며, 숨 가쁘게 달려오던 누이동생도 그때 그 길을 기억한다네. 또 구순의 어머니는 까마득한 옛일을 어제처럼 기억하신다.

세월의 흐름이 유수 같다고 한다. 우리의 꿈과 애환이 깃든 추억의 가로수 길도 많이 변했다. 비포장 자갈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오랜 기억을 지우고, 가로수는 이팝나무와 벚나무로 선수를 바꿔, 버들피리 꺾어 불던 옛 추억을 소환한다. 빠르게 달리던 고속버스는 초라한 모습으로 천천히 국도를 오간다. 아낙네들의 시끌벅적한 수다와 웃음소리마저 숨죽여 흐르는 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샘물이 되어 가슴을 적신다.

김영일(수필가, 2021 문학생활 작품상 수상작)

비사벌뉴스 bsb2718@hanmail.net

<저작권자 © 비사벌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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