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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늪으로 화왕산에서 범내려온다

기사승인 2022.01.18  10: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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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사진 이인식위원

 

소목의 새아침

“범에게 제사 드려서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 후한서 동이전에 나오는 말이다. 실제로 화왕산 용지 발굴에서 ‘호랑이 뼈’가 나왔다. 다른 동물 뼈와 출토되어 제사용으로 보인다는 것이 발굴기관의 설명이다. 단군신화와 수로신화는 산악신앙의 가장 오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두 신화에서 산은 신으로서는 그가 강림하는 자리이고, 사람들로서는 강림하는 신을 받드는 자리이다. 단군신화에서의 산은 신의 강림처이면서 아울러 신의 주거처로 관념되어 있기도 하다. 단군의 죽음이 입산 후 산신이 된 것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후세에 범을 산신과 동일시하여 숭앙한 원류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호랑이 자체가 산신령으로 간주하는 사례는 오늘에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범(호랑이)해에 화왕산에서 살던 범이 가야고분을 지나 우포늪에 와서 새해 맛있는 야생동물들을 잡아먹었을 것이다. 더하여 낙동강 늪 물을 마시며 물속에서 온몸을 흔들며 목욕을 즐겼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이다. 새해 즐거운 덕담이고 앞으로 창녕의 생태역사문화를 미래설계도이다. 한편 이러한 고문헌과 발굴현장에서 나온 자료뿐만 아니라 군민들이 살아가는 현장에서도 설화나 실제 경험한 이야기들을 기억에서 기록으로 모으는 작업을 행정과 문화원, 지역언론 등에서 검은호랑이해에 하면 좋겠다. 더하여 산신령 범도 중요하지만, 비화가야 이후 많은 범 같은 인물들이 이곳에서 출생하거나 선정을 베풀고 떠난 역사 속 흔적들도 찾으면 좋겠다.

도동서원과 관산서원을 생각한다.

한원당 김굉필과 한강 정구선생에게서 대한민국의 나아갈 길을 새해에 물었다. 새해 아침 소목에서 임인년 호랑이해에 선거에서 올곧은 사람이 뽑히기를 두 손 모았다. 고을수장과 국가수장을 뽑는데 패거리 선거가 아닌 훌륭한 선현들의 행적을 실현할 인물을 찾는 일이다. 새해 벽두 언론에서는 대통령을 뽑는 뉴스에 국민들의 눈을 집중하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개인 사생활이나 신상잡기로 민초들의 판단을 어지럽히는데 앞장 서고 있다. 그래서 요즘 가짜뉴스니 기레기 기자라는 말이 시중에 회자 된다. 덧붙여 적어도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여러 경로의 지식과 정보를 취합하여 종합판단은 고사하고, 부모 자식, 친구 사이에도 정치판 편가르기로 다투는 것을 자주 본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서둘러 판정하는 섣부른 판단이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힌다. 답은 각자가 올바른 식견과 지혜로 주변의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사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적어도 국가를 경영할 인물을 뽑는 선거에는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중심 판단을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집에 대문을 열 때도 누군지 확인하는 것을. 선거 때만 되면 점집이 문전성시이다. ‘관상’이라는 영화에서 조선시대 최고 관상쟁이도 인조반정이 일어날 것은 모르고, “난 사람의 관상만 보았지, 시대를 보지는 못했소.”라고 씨부린다. 이럴 때 우리는 순자(荀子)의 말을 되새겨야 한다. “형모(形貌)를 보는 것이 마음 상 보는 것만 못하고, 마음을 논하는 것이 덕(德)을 논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긍정의 마음, 베푸는 마음, 성실한 마음이 중요하고 제일 중요한 것이 덕이니 결국은 덕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관상에서 핵심은 관상불여심상(觀相不如心相)이다. 아무리 보이는 게 좋아도 심상 좋은 것만 못하다는 말이다. 새해에 선거 이야기를 화두로 70인생을 살아오면서 결국 깨닫은 바는 역사 속에서 평가된 선현들의 모습에서 관상이나 가짜뉴스로 세상이 판을 쳐도 후손들이 가야 할 길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서 소학처사로 알려진 한원당 김굉필 선생이나 화왕산 자락 아래 토평천으로 물길을 내어주는 ‘관산서원’에 모셔진 한강 정구선생 같은 선현들에게서 지혜를 얻어 선거든 일상의 삶의 길을 찾아내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한원당의 외증손인 한강은 창녕출신은 아니지만 창녕현감으로 부임하여 창산지를 만들고, 여덟 곳에 정자를 세워 후학들을 양성했다. 한강의 흔적은 우포늪 세진마을은 창녕조씨 집성촌이다. 마을 이름을 세진(세상의 나루터)로 짓고, 늪가에 만진정을 지었다. 이것은 한강의 스승인 창녕조씨인 남명 조식을 흠모한 마음이 닿았으리라 추측해 본다.

가야토기는 늪에서 재료를 찾아썼다

“함안군 법수면 질날늪. 등지의 갈대밭 밑에서 채취한 粘土는 아라토기 제작의 胎土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함주지에 있는 것으로 보아 비화가야 토기도 우포늪과 용호벌 등에서도 태토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낙동강의 선물인 우포늪과 남강으로 이어진 많은 습지들은 인류문명사에서 많은 역사생태문화를 창조해 왔다. 우포늪은 낙동강이 만든 선물이다. 강 배후습지(back marsh, back swamp)와 늪은 낙동강 중류인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사이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낙동강과 합류하는 남강 지역도 많은 배후습지들이 산재하면서 여름철에는 강이 범람하여 홍수가 일상적이었다. 함안군의 지형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형이다. 함안의 남동쪽에는 해발 600~700m의 산들이 둘러싸 창원·마산·진주와 경계를 이루며, 북쪽에는 남강이 동진하여 낙동강과 합류하고 있다. 남쪽 산지에서 발원한 크고 작은 溪谷流水(계곡유수)를 이용한 谷間(곡간)평야와 남강·낙동강의 배후 저습지를 이용한 농경이 안라국 경제의 기반이 되었다. 낙동강·남강을 이용한 교통로도 “안라‘의 주요 성장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아라가야 시대의 가마터는 천제산 기슭을 빙 돌아가며 분포되어 있다. 천제산 기슭은 古代의 가마터로서의 입지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가마에 땔 나무는 천제산에서 베어 오고, 粘土(점토)는 남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저습지 또는 늪의 갈대밭 밑에서 채취했고, 남강과 낙동강의 水路를 수송로를 삼았던 것이다. 함안 아라가야 박물관 白承玉 박사는 “함안 일대 가마터 수와 규모를 보면 안라국의 자체 수요를 넘습니다. 전성기 안라국의 인구는 5만 명을 조금 웃돌 정도로 추산되거든요. 안라국의 토기는 가야 諸國과 일본열도에 수출하기 위해 대량 생산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언론사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렇게 함안의 함주지와 함안 아라가야박물관 기록을 통하여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에는 범람원 모래톱 가까이에서 수렵과 채집 그리고 물산 교류와 가야문화를 꽃피웠던 것은 자연의 선물인 습지 덕분이다.

오키나와 물소를 늪에서 키웠다

조선왕조실록과 함주지 등 기록에는 가야읍 산서리와 묘사리 경계지점에 물소목장(水牛放牧)이 있었다. 전하기를 유구국왕(琉球國王) : 오끼나와왕)이 헌납(獻納)한 물소(水牛)를 이곳에서 방목(放牧)했다고 한다. 함주지의 고적조(古跡條)에 「代山白沙之界有汚地名曰水牛放牧諺傳琉球國獻水牛命牧牛此牛飽則入水臥眼云」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물소목장의 위치 비정(比定)에 있어 가야동 앞 늪지(별구)를 지칭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代山白沙之界」는 가야동이 아니라 오늘날의 가야읍 묘사리와 산서리의 경계로서 묘사리 입구에 있었던 옛 늪지를 당시의 물소목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더하여 세조 때에 이르러 일본 유구국(옛 오키나와에 있던 나라)에서 처음으로 물소 2마리를 조공물품으로 받치면서 물소 도입의 꿈이 이뤄지게 된다. 역대 왕들이 물소를 도입하고자 노력했던 이유는 물소의 뿔이 주요 군수품인 활을 제조하는 원료였기 때문이다. 물소의 뿔은 당시 최고의 활을 만드는 흑각궁의 재료가 되는데, 물소 뿔을 자체 조달하기 어렵다 보니 중국 등으로부터 수입을 했다. 활 제조에는 한우의 뿔을 이용하기도 했는데 뿔의 크기가 작아 많은 뿔이 필요했고 활의 품질도 물소뿔을 이용한 것보다 좋지 못했다. 오키나와로부터 물소 도입에 성공한 세조는 물소를 창덕궁 후원으로 옮겨 기르게 하면서 사복시(司僕寺) 관원은 물론 의생(醫生)이 물소의 사양법을 책으로 만들고 이를 익히도록 했다. 이렇게 도입된 물소는 17년이 지난 성종(成宗) 대에 70두까지 늘어나 잘 번식시키는 지방 수령(守令)은 직급을 올려주기도 하는 등 상벌을 내리기도 했다. 이처럼 함안늪 뿐만 아니라 창녕의 늪에서도 물소를 방목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세종대왕을 비롯한 세조 등의 왕이 직접 물소를 수입하여 국가안보를 생각하는 일은 지금과 조금도 다름이 없지 않는가? 한편 조선왕조 실록에서 이러한 물소의 기록을 찾은 몇몇 역사학자들은 물소가 우리 한우의 개량에 활용됐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역사학자 김동진은 그의 대표 저서 <조선의 생태환경사>에서 한우는 물소와 여러 차례 교배된 특징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체구가 아시아 지역 다른 품종 소보다 체구가 크고 농작업을 잘하는 것으로 보아 물소의 자질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소는 물소속의 아시아물소종, 한우는 소속의 한우종으로 다른 종이기 때문에 자연적인 교배는 불가능하고 설사 교배에 성공해 송아지를 생산하더라도 후대 번식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비사벌뉴스 bsb27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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