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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식 문화관광해설사의 숨은 문화재를 찾아서(104회)

기사승인 2022.11.11  08:5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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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江, 그리고 昌寧의 물길-Ⅷ-창녕의 나루터

산은 강의 원천이다. 산 능선에 따라 물줄기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계곡이 빗물을 모아 작은 실개천을 만들고 개울이 되어 마침내는 큰 강이 된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수많은 생명체가 물에 기대어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강원도 태백산 황지못(또는 너덜샘)에서 시작된 낙동강이 약 18일간의 긴 여행 끝에 부산 다대포 앞에서 남해로 흘러든다.

낙동강은 1,300리로 남한에서 가장 길다. 황지못에서 삼강나루까지 600리는 배가 다닐 수 없다. 흔히 낙동강 700리라 하는 것은 배가 다닐 수 있는 가항거리(可航距里)를 말한다.

조선 시대의 내륙교통은 말을 이용한 육상교통과 배를 이용한 수상교통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육상교통은 파발(擺撥)과 같이 국가 중대한 연락사항을 전달하는 경우 및 양반들과 같은 특권층에게서만 이용했다. 백성들은 등짐과 봇짐을 이고 지고 울퉁불퉁한 길은 걸어서 다녔다. 많은 양의 물류나 사람의 왕래는 물길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낙동강 배가 다니던 구간 700리에는 300여 개의 나루터가 있었다. 예천 삼강나루터, 상주 낙동나루터, 고령 개경포나루, 대구 사문진나루터, 양산 물금나루, 부산 구포나루등이다. 삼강나루, 사문진나루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옛 나루터를 복원하고 관광지로 개발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낙동강의 창녕 구간은 60km(150리)다. 상류부터 경북 고령군 우곡면-합천군 덕곡면과 청덕면-의령군 낙서면과 부림면, 지정면-함안군 대산면과 칠서면, 칠북면-창원시 북면까지 강 건너 경계를 이룬다. 150리 물길에는 20여 곳의 크고 작은 나루터가 있었다.

행정 4개 시․군이 만나는 지점 1곳, 3개 시․군이 만나는 지점이 곳(3)이 있다.

첫 번째 회천과 낙동강을 경계로 창녕군, 합천군, 고령군, 달성군이 만난다.

두 번째 의령 정곡천(신반천)과 낙동강을 경계로 창녕군, 합천군, 의령군, 세 번째 남강과 낙동강을 경계로 창녕군, 의령군, 함안군, 네 번째 청도천과 낙동강을 경계로 창녕군, 창원시, 밀양시가 마주 보고 있다.

창녕군 구간에 낙동강, 황강, 남강 3개의 국가하천이 만난다. 즉 육상교통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는 1960년까지 교통과 물류가 흐르는 동서남북의 교차점에 있었다.

나루터는 배로 물은 건너는 터를 말한다. 작은 나루터는 장을 보러 가거나 농사등 강 근처 백성들이 사용하였다. 큰 나루터는 물류를 싣고 나르던 규모가 큰 배가 드나들던 상권(商圈)이 형성되었다. 큰 나루터에는 장이 열렸고 마을이 들어섰다. 손터나루에는 고방장이 있었고, 적포나루터에는 이남장, 박진나루터는 남일장이 열렸다.

예전에는 주요한 교통 근거지였으나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나루터와 장들은 사라졌다. 옛 나루터는 고속도로와 국도를 연결하는 다리와 보(洑)가 건설되었다. 인적 없는 강가에 서 있는 팽나무, 상수리나무, 대나무 숲이 옛 나루터임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창녕 150리 물길에는 손터나루, 밤마리나루, 우산나루, 삼학나루, 등림나루, 감물창나루, 적포나루, 우질포나루, 마수원나루, 이이목나루, 박진나루, 백곡나루, 창나루, 도흥나루, 웃개나루, 창암나루, 밀포나루, 임해진나루, 학포나루등 20여 곳의 크고 작은 나루터가 있었다. 지금은 몇몇 이름만 남아있다.

부곡면 학포리 학포나루는 예천 삼강나루와 대구 사문진나루처럼 문화생태관광지로 조성했으면 한다. 부곡온천, 비봉리 패총전시관, 학포농산물장터와 연계한 「학포주막촌」을 열어 부곡온천간 셔틀버스 운행, 100만 도시 창원시민이 즐겨 찾을 수 있는 관광명소로 만들 것을 제안한다.

손터나루터와 고방장(高坊場)터

경북 고령군 우곡면 객기리와 창녕군 이방면 송곡리 곡교(굽다리, 曲橋)마을을 연결하는 나루터다. 낙동강 창녕 60km중 가장 상류에 있다.

옛 고령 대가야의 큰 항구로 낙동강을 거쳐 김해, 함안, 고성, 하동 등이 거래처이며 중국과 일본의 교역항이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김해, 구포, 마산 등지의 해산물과 고령, 합천, 거창, 성주의 교통요지로서 많은 사람이 묵어갔다 하여 손 터나 루(객기, 客基)나 누라 했다. 많은 주막과 여각이 있어 길손들이 풍류를 즐겼으며 낙동강과 회천이 만나는 곳이라 넓은 백사장과 주변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무심사로 들어가는 초입 오른편 백사장에 옛 고방장이 열렸던 곳이다.

이 고방장은 100여 년 전 경신 대홍수 때 한밤중에 물이 밀어닥쳐 아무도 피하지 못하고 몰살당했다 한다. 잠귀 밝고 날랜 젊은이 몇 명만 강가 버드나무에 올라 목숨을 건졌다. 그 후 마을과 장은 없어지고 현 이방장 근처로 옮겼다. 현 이방장(4일, 9일)은 민초들의 음식인 수구레국밥(국수)이 널리 알려져 있다. 장터에서 국밥 한그릇 비우고 어슬렁 거리다 차에 올라 근처 합천군 덕곡면 오광대발상지, 산토끼노래동산에 들려 보시길 권한다.

인근 무심사(無心寺) 옆 자전거길로 100미터 올라서 내려다보는 낙동강 풍경은 어느 사람이 “이탈리아 나폴리항보다 더 아름답다”라고 감탄했다.

율지(栗旨, 밤마리)나루터

율지리는 지형·지세가 독특하다. 낙동강이 대구 경북 땅을 벗어나는 지점, 낙동강 본류와 모둠내(회천)가 만나는 어귀에 속칭 ‘밤마리’로 불리는 율지리가 있다. 행정적으로 2개 도(경남, 경북) 4개 군(합천군, 창녕군, 고령군, 달성군)이 만나는 곳으로, 육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오지였다.

이런 지리적 조건 덕분에 구한말까지 수로 교통의 요충지로 물류 거점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로 교통이 쇠퇴하며 내륙 두메산골로 전락했으나 다리가 놓인 뒤엔 대중교통이 호전되어 다시 옛 명성이 살아나고 있다.

1999년 율지교(길이 640m)가 놓이기까지 율지 사람들은 오로지 나룻배에 의지해 밖으로 나갔다. 다른 지역보다 나루에 의지한 세월이 길었다. 광복 전후까지 율지나루에는 큰 선창 시장이 열렸다고 한다. ‘경상도읍지’(1832년)에 따르면, 율지에는 6일장이 섰는데 하류에서 올라온 상인들이 소금 등 해산물을 팔고, 대신 삼과 곡물을 사 갔다고 한다. 당시 율지장은 주변의 현풍장, 이방장, 고령장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많은 사람이 붐볐다. 장은 해방 후에도 이어져 부산, 김해에서 젓갈, 소금을 싣고 온 배들이 건어물, 땅콩, 감자, 무 콩, 배추 등을 싣고 다시 내려가곤 했다.

‘합천군지’(1995년 간행)에는 조선 후기 율지장의 모습이 생생하게 소개되 있다.

‘…한창 성시를 이룰 때 매일 소 2마리, 장날이면 소 5마리씩을 잡았고, 도축 전문 업소만 10개소가 넘었다. 당시 지역주민의 호수는 현재 덕곡면 전체보다 많은 800여 호에 달했다. 나루의 주막거리는 큰 가마솥 10개가 걸려 매일같이 김을 내뿜었고, 포구엔 크고 작은 배 10여 척이 늘 정박했으며, 한량들과 기생들의 노랫가락에 장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생선배가 들어오면 요란하게 징을 울려 알리면 아낙네들은 함지박을 이고 경사 난 듯 모여들었다.

소금배가 닿을 때는 많은 사공들이 뱃줄을 당기고 도사공은 상앗대를 짚어 방향을 잡아 선착하였다. 큰 배는 곡식 이삼백 섬을 실었고 작은 배는 백여 섬을 실었다. 배가 들어오면 한 척당 선방에서 물건을 나르는 사람을 20여 명씩 데리고 왔기 때문에 주막과 여각 붐볐다. 1930년대까지 큰 배가 다녔으며, 보통 5∼6명이 승선하는 범선이 구포에서 율지까지 오는 데는 보름이 걸렸다.’

이처럼 활발한 나루터 번성은 오광대 놀이패가 뿌리내릴 수 있는 바탕이 됐다. 그러니까 율지나루는 대광대(竹廣大)패를 낳은 ‘오광대놀이’의 발상지이다. 1860년 경에 강 하류 사천(가산오광대), 고성(고성오광대), 통영(통영오광대), 마산(마산오광대), 부산(동래야류)등에 전파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무릇 발상지의 문화는 세월이 지나면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합천의 대광대도 명맥이 끊어졌다. 오랜 세월이 흘러 1990년대 합천군 덕곡면장으로 부임한 최호준(崔昊準, 65세)씨 노력으로 다시 발굴되어 ‘합천 대광대’가 부활하여 계승되고 있다.

아마 창녕현(군)과 영산현(군)에도 ‘합천 대광대’와 유사한 오광대 놀이패가 있었을 것이다. 옛 자료와 흔적을 찾아 누군가의 노력으로 창녕오광대(대광대)가 복원되기를...

비사벌뉴스 bsb27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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