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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1300리 누각과 정자 이야기(3회)

기사승인 2023.05.02  11:4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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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 지류 내성천, 운곡천권역

낙동강 1300리 누각과 정자 이야기(3회)

춘양목의 고장, 봉화군 누정-Ⅰ

낙동강 지류 내성천, 운곡천권역

오종식창녕군문화관광해설사

 

하층민들의 수고로움을 생각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자문화는 조선 상류층 선비 문화다. 자연에 뭍혀 바람과 물소리로 자신의 마음을 맑게 닦는 곳이다. 주옥같은 문학작품처럼 그들의 성품도 그러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곤한다.

그들 문화를 위해 손발이된 백성들의 노고에 대한 기록은 없다. 선비들의 풍류엔 반드시 하층민들의 크고 작은 수고로움이 있었을 것이다.

흥취에 취한 나머지 민초들의 배를 굶기지는 않았는지, 댓가는 제대로 치뤘는지가 궁금하다.

그 땐 아무나 누정에 오를 수 없었던 시대다.

하지만 요즘은 누구나 누각과 정자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자유로운 시대다.

누정에 올라 옛사람들의 낭만을 흉내 내며 마음껏 누려보자. 정자는 즐기는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래도 되는 시절이다.

봉화군 들여다보기

봉화군은 경상북도 북부로 강원도 태백시와 경계를 이룬다.

산경표에 따르면 동쪽은 낙동정맥(태백산맥)이 뻗어있고, 북쪽과 서쪽엔 강원도 태백산에서 갈라진 백두대간(소백산맥)이 32km가 병풍처럼 이어진다.

태백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산이 17개로 고산준령으로 이어져 경관이 빼어나고 안동문화권에 속하는 선비문화가 곳곳에 서려 있다.

옛 선비들의 정자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정자문화생활관」, 우리나라 핵심 생태 축인 백두대간 및 고산 지역의 식물 자원을 수집하여 보전하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불려온 청량산은 기암절벽과 낙동강이 어우러져 절경을 만들어 내는 「청량산도립공원」이 있다.

봉화군 춘양면은 난세(亂世)의 피난처인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다.

이 깊고 깊은 산중에 임진왜란 후 1606(선조 39)년 태백산 각화사 근처에 선원각과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관하는 「태백산사고」가 설치되었다.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봉화군에 이르러 석포리 천, 회룡천, 현동천과 합류하여 명호면을 거쳐 안동으로 흘러가고, 서부지역을 가로지르는 내성천은 봉화읍을 감싸돌며 몸집을 불려 예천군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전 계명대학교 식물사회학 김종원 교수님은 “내성천은 모래 샛강으로 물이 맑고 깨끗해 우리나라 하천생태의 교과서로 불린다.”고 했다.

기후는 대륙성기후로 연교차와 일교차가 크다. 연평균강수량은 1,211mm내외다. 젓나무, 자작나무, 참나무류 등 숲이 울창하며 궁궐이나 관아 등을 짓는 데 사용하던 춘양목이 유명하다.

옛 기록에 토지는 척박했고 풍속은 절검하며 양잠에 힘썼다고 한다.

고려 후기 봉화를 본관으로 하는 금씨(琴氏), 정씨(鄭氏)가 중앙정계에서 큰 활약을 하면서 많은 인재가 배출됐다.

조선 중기부터 안동지역 사족(士族)들이 이주해왔다. 대표적 인물이 유곡(酉谷, 닭실)로 이사 온 권벌(權橃)이다.

봉화의 누각과 정자

봉화 누각과 정자는 1400년대 시작으로 꾸준히 증가하여 1700년대 정점을 이루었다. 봉화에 현존하는 누각과 정자는 약 103개로 이 가운데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34개에 달한다.

읍면별로 분석해 보면 봉화읍과 법전면, 춘양면 일대에 밀집 분포되어 있으며, 그 지역에 오랫동안 정착하여 살아온 집성 성씨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군의 아름다운 물길에 9개 물굽이를 뜻하는 구곡(九曲)이 8개 있고, 신선들이 노닐던 이상향을 뜻하는 동천(洞天)이 22개가 있다.

봉화 누정의 배경과 특징

사미정의 가을

봉화 전체면적의 80% 이상이 산지다. 산이 높으면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계곡이 발달한다. 성리학이 정착한 16세기 이후 수많은 선비들이 봉화로 이주해왔다.

그리고 조상의 덕을 기리고 후학 양성에 힘쓰며 계곡 언덕에 누정을 세웠다.

조선 중기 누정은 향촌에 유교적 이상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사림들에 의해 지어졌다. 18세기 이후에는 문중이 주목받으며 경쟁적으로 누정을 세웠다.

봉화지역 누정은 추모, 학문, 후학양성에 목적을 두어 소극적, 폐쇄적, 정적인 구조다.

이는 다른 지역의 풍류와 여흥을 즐기는 탁 트인 개방적인 건축구조와 다른 봉화 누정 건축만의 특징이다.

정자의 평면은 대부분 사각형이다. 온돌과 방을 설치하고 툇마루를 달았다. 추운 지방이라 2중문을 달아 바깥 차가운 공기를 막았다.

봉화의 춘양구곡(春陽九曲)

춘양구곡은 경암 이한응(1778~1864)이 춘양면~법전면을 흐르는 운곡천 9km에 아름다운 곳과 유서 깊은 곳에 정했다. 구곡은 경관이 아름다운 물길의 9개 물굽이를 뜻한다.

이한응은 서예와 시문을 잘했고 운곡천 옆 법전면 녹동마을에 성리학을 공부하며 제자양성에 노력했다.

옥계정(졸천정사)

춘양구곡은 ①어은-②사미정-③풍대-④연지-⑤창애-⑥쌍호-⑦서담-⑧한수정-⑨도연서원까지다.

춘양구곡에는 3개의 정자가 남아있다. 사미정, 창애정, 한수정이다.

경북 유형문화재 사미정(四未亭)은 옥천 조덕린(玉川 趙德隣, 1658~1737), 경북 문화재자료 창애정(滄厓亭)은 창애 이중광(滄厓 李重光, 1709-1778), 보물 한수정(寒水亭)은 석천 권래(石泉 權來, 1562-1617)가 지은 정자이다.

사미정(四未亭)

사미정의 여름

춘양구곡 중 제2곡이 사미정이다.

사미정은 운곡천이 휘감아 도는 마암(磨巖)으로 부르는 바위 언득에 있다.

이 주변을 요즘은 사미정계곡으로 부른다.

조선 후기 옥천 조덕린이 늙어서 세운 정자다. 한양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다 당쟁에 휘말려 여러번 유배를 당했다.

학문이 높고 깊어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던 학자답게 원망이나 절망하지 않았다.

“내가 종성(함경북도)에 유배된 지 3년 그 해가 정미(丁未)가 되고, 그 해의 6월이 정미가 되고, 그 달의 22일이 정미가 되고, 그 날 미시(未時)가 또 정미가 되었다. 이런 날을 만나면 무릇 경영하는 자는 꺼리지 않았고 음양가는 이런 날을 존중하여 만나기 어렵다고 여겼다.

사미정 현판(번암 체제공 글씨)

이때 「중용(中庸)」을 읽다가 공자의 말씀에 ‘군자의 도가 4가지인데 나는 그 중에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고 하는데 이르러 책을 덮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성인은 인륜의 지극함이거늘 오히려 능하지 못하다 하는데 우리들은 마땅히 어떠한가 ?’하였다.

마침내 이러한 일시를 만나 한 음절을 지어서 살려고 생각하며 ‘사미(四未)하고 하였다.’
참고) 여기서 군자(君子)의 도(道) 4가지는 공경혜의(恭敬惠義) 즉 몸가짐을 공손하며, 윗사람 섬김이 진실되며, 백성을 대하는데 은혜로우며, 배성을 부리는 것이 의롭게 하는 것이다.

현판 ‘四未亭과 磨巖’ 글씨는 정조 때 탕평책을 추진한 번암(樊巖) 체제공(蔡濟恭, 1720~1799)이 쓴 글이다.

사미정 마루에서 내려다 보는 운곡천의 경치는 일품이다.

희고 편편한 화강암 너럭바위와 그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 그리고 푸른 소나무숲은 눈을 시원하고 맑게 해준다.

시미정의 조덕린 정신은 300년 이상 이어져 오고 있다.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라 했다. 꽃향기는 백리를 가고 술향기는 천리를 가는데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고 했다. 나의 향기를 몇리나 갈까 ? 

비사벌뉴스 bsb27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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