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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식문화관광해설사의 숨겨진 문화재를 찾아서(65)

기사승인 2021.01.01  10: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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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장서(巴里長書)와 창녕유림(昌寧儒林) 독립운동

유어면 이정후묘소

이번에는 역사를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역사적 사건을 소개한다.

삼일운동 직후 유림대표들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사건이다.

파리장서란 1919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담에 대한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우리나라 유림대표들이 작성하여 제출한 장문(長文)의 청원서를 말한다.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지산 김복한((志山 金福漢)을 비롯한 137명 유림대표가 서명한 청원서를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이 상해로 가져갔고, 김규식을 통해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되었다.

또한 각국 대표와 외국공관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

사실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중에는 유림대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 500년 동안 유교는 지배적 사상이었으나 유학자였던 양반 사대부들은 나라가 망해도 무심했다. 일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대한제국을 병합하는데 공로가 있는 한국인들이게 작위를 수여하는데 바로 1910년 10월 ‘합방 공로작(功勞爵)’이다. 수여받은 76명 모두가 양반 유학자였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 대표가 이끄는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운동을 일으키자 유림계는 당황한다. 이에 유림은 3.1독립운동 이후 독자적인 활동을 했는데 곧 파리장서사건이다.

고암면 계팔 김희봉묘소

거창에 은신중인 면우 곽종석(郭鍾錫)이 대표가 되어 프랑스 파리의 강화회의에 독립 주선을 요망하는 탄원서를 보낼 것을 계획하여 전국 유림의 찬성을 얻었다.

이 장서(長書) 즉 독립탄원서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상해로 비밀리에 가져가 영문으로 번역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우송되었는데 장서의 내용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서의 핵심적 내용은

① 여러 나라 여러 겨레는 제각기 전통과 습속이 있어 남에게 복종이나 동화를 강요받을 수 없으며,

② 사람이나 나라는 그 자체의 운용능력이 있게 마련이므로 남이 대신 관리하거나 통치할 필요가 없으며,

③ 한국은 삼천리강토와 2,000만 인구와 4,000년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며 우리 자신의 정치원리와 능력이 있으므로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하며,

④ 일본은 지난날 한국의 자주독립을 약속했지만 사기와 포악한 수법으로 독립이 보호로 변하고 보호가 병합으로 변하게 했고, 교활한 술책으로 한국 사람이 일본에 붙어살기를 원한다는 허위선전을 하고 있으며,

⑤ 일본의 포악무도한 통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우리는 거족적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만국평화회의와 폴란드 등의 독립소식을 듣고 희망에 부풀어서 만국평화회의가 죽음으로 투쟁하는 우리 2,000만의 처지를 통찰해줄 것으로 믿고 있음을 주장했다.

고암면 우천리 강신혁묘소

이 장서에 서명한 유림대표 137명중 창녕군 유학자로 고암면 조긍섭(曺兢燮 1873~1933), 노상직(盧相稷 1855~1931), 강신혁(姜信赫 1879~1966), 고암면 계팔 김희봉(金熙琫 1875~1927), 이방면 노도용(盧燾容 1883~1952), 유어면 이정후(李定厚 1871~1950)등 6명에 이른다.

이정후 묘비

1. 심재 조긍섭(深齋 曺兢燮 1873~1933)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중근(仲謹)이며 호는 심재(深齋)이다.

조선말과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의 성리학자이며 시인이다. 창녕군 고암면 원촌리 출신으로, 곽종석(郭鍾錫), 이종기(李種杞), 장복추(張福樞), 김흥락(金興洛) 등에게서 수학하였다. 한일 합방조약 체결 이후 은둔하면서 시문과 저술로 일생을 보냈다.

대한제국 말 유학자로서 파리장서에 서명하여 1919년 음력 3월 18일경 대구헌병사령부에 연행되어 대구형무소에서 8개월 옥고를 당했다. 그 해 일본 총독과 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초(抄)하다가 왜경에게 발각되어 17일간 구속되었다. 이후 덕암서원 등에서 저술과 교육에 힘써 유고 「심재선생문집」(1935년)등 10여권이 있다. 조긍섭은 일정한 스승은 없었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매우 영특하여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다. 1933년 61세로 사망했다. 묘는 대합면 수장에 있다.

2. 노상직(盧相稷 1855~1931)

본관은 광주이며 자는 치팔(致八), 호는 소줄(小訥) 눌인(訥人)이다. 교리 대눌 상익의 아우이며 성재 허전의 문인이다. 창녕 유림과 후진 양성에 기여한 영남 학맥을 정통으로 이은 구한말부터 일제 초기 영남 거유(巨儒)이다. 한일합병이 되자 파리장서에 서명하였으며, 후에 서간도에 망명하여 2년여 활동하였다. 귀국 후 이방면 동산서원, 김해 금곡서당, 밀양 자암서당에 자술과 교육에 전념하여「소눌선생문집」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또 옥야면 강약계를 조직하여 유풍 진작과 옥야면 내 주민자치까지 도모하였다. 이방면 마연동에 영각 연천당에 배향했다. 묘는 김해 금곡에 있다.

강신혁 묘비

3. 천여 노도용(天汝 盧燾容 1878.10.10~1952.2.20)

자는 천여(天汝) 호는 인재(認齋)로 소눌 노상직의 문인이다. 묘는 이방면 옥야리에 있다.

1878년 10월 10일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평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창녕 일대의 유림으로, 1919년 3월 곽종석, 장석영, 김창숙 등의 유림들이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작성한 파리장서에 서명했다. 이후 창녕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2년 2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2016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320실 62호에 안장했다.

4. 작여 이정후(綽汝 李定厚 1871.11.22~1950.9.15)

유어면 출신으로 일명 근후(根厚) 자는 작여(綽汝) 호는 지와(止窩)인데 소눌 노상직의 문인이다.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는 유어면 부곡리 내부곡에 있다.

5. 우산 강신혁(友山 姜信赫 1879.10~1966.8.20)

고암면 억만리 출신(본적은 밀양군 부북면)으로 호는 우산(友山)인데 소눌 노상직의 문인이다. 당시 창녕에서 덕곡서당(德谷書堂)을 창건하여 한학을 가르치던 강신혁 역시 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는 고암면 우천리 고암공고 뒷산에 있다.

김희봉 묘비

6. 간취 김희봉(澗翠 金熙琫 1875~1927)

본관은 서흥이며 자는 찬문(贊文), 호는 간취(澗翠)이다.

1874년 11월 25일 경상도 창녕현 월미면 계팔동(현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계상리 계팔마을)에서 태어났다.

1919년 영남 지방 유림 중 한 사람으로서 경상도 유림들로부터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의 서명을 받아 내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1919년 음력 3월 18일경 일본군 헌병에 발각되면서, 그는 고암면 원촌리 출신의 유학자인 조긍섭과 함께 대구 헌병사령부에 연행, 구금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해 5월 16일 대구지방검찰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언도받고 출옥하였다.

그 후 그는 3.1 운동 1주기를 즈음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1920년 2월 창녕면 장날에 「통곡아팔역 동포 오주열강(慟哭我八域 同胞 五州列强)」이라는 선언문을 작성, 낭독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금 고초를 겪었다. 이후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 받다가 1928년 1월 7일 죽었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마을 안에 2001년에 세운 애국지사간취김희봉선생기념비(愛國志士澗翠金熙琫先生紀念碑)가 있다. 묘는 고암면 계팔에 있다.

비사벌뉴스 bsb27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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