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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1300리 누각과 정자 이야기(8회)

기사승인 2023.05.08  20:4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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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백산에 깃든 선비의 숨결, 영주시 누정-1(십승지의 땅, 금계계곡과 금선정)

십승지의 땅, 금계계곡과 금선정

오종식 창녕군 문화관광해설사

금선정 파노라마

우리나라 누각과 정자 중 문화재로 지정된 수가 301곳이다. 그 중 경북이 100곳이다. 국가지정 문화재인 보물 20곳 중 경북이 10곳, 반을 차지한다.

안동 임청각 체화정 청원루, 예천 야옹정, 김천 방초정, 봉화 한수정, 대구 하목정, 청송 찬경루는 낙동강 수계다. 경주 관가정 귀래정은 형산강 수계다.

고려 때 학자 이규보의 사륜정기(四輪亭記)에 ‘사방이 뚝 트여 텅 비고 높다랗게 만든 것이 정(亭)이고, 비슷한 구조를 가진 사(舍)와 누(樓)는 다르다.’라고 누정을 구분했다. 사륜정(四輪亭)은 네 바퀴가 달린 정자다. 움직이는 이동식 정자다.

조선시대 하륜은 ‘누(樓) 하나 폐(廢)하고 흥(興)하는 것으로 한 고을의 슬픔과 기쁨을 알 수 있고, 한 고을의 슬픔과 기쁨으로 한 시대의 도(道)의 오르내림을 알 수 있다.’라며 누정(樓亭)이 한 고을이 사람이 살기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누정은 단순히 풍류를 즐기는 곳만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치유하며 유학을 공부하고 인재 양성, 조상들의 정신을 이어받고 추모하는 곳이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하고 여론을 모으고, 나눔과 베풂의 공간 등 다양한 역할을 했다. 이처럼 누정은 한 고을에서 매우 중요한 여러 가지 기능을 했던 상징적인 곳이다.

○ 영주시에 대해

풍기읍 일대

경북 북부 작은 시로 인구는 약 10만 명(2022년 기준)이다. 동부는 봉화군, 남부는 안동시, 서부는 예천군이 있고, 북부는 죽령을 경계로 충청북도 단양군, 마구령을 경계로 강원도 영월군과 이웃이다.

경북 북부 지역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영주역에 중앙선, 영동선, 경북선이 교차한다. 중앙선

KTX가 풍기역과 영주역에 정차한다.

북쪽에 소백산이 있어 험하고 중부와 남부는 낮은 구릉 지대로 논밭이 많고 과수원도 많다. 특히 시골길을 가다 보면 사과 농장이 펼쳐져 있다.

영주의 문화재는 국가지정문화재 53점(국보 7점 보물 27점), 경북도 문화재 95점 지정문화재가 148점이다.

영주의 누정은 가학루, 금선정등 74곳이고 구곡(九曲)은 죽계구곡, 소백구곡, 초암구곡, 운포구곡, 무도칠곡, 동계구곡, 초계 구곡 등 7곳이다.

대표 문화재는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부석사, 내성천 무섬마을, 옛 풍기군의 풍기인삼, 정감록의 10승지 중 하나인 풍기읍 금계리가 있다.

○ 영주 옛 풍기군 금선정(錦仙亭)

금계 황준량을 추모하기 위한 정자

답사일정 : 2022. 7. 11 13:30, 2022. 22. 2 16:24

봉화 답사를 마치고 영주시 금선정으로 차를 몰았다. 영주시는 이웃이다. 동양대학교를 돌아 금계마을 옆을 지나는 금계천을 따라 금선계곡이 있다.

마을이 끝나는 곳 오른편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나타났다. 직감적으로 숲 어디쯤 금선정이 있겠다고 생각했을 즈음 네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다.

금선정이다.

주차장 아래 금계천이 흐른다. 계곡은 퇴적암이 깎여 제법 깊다.

나무(적송, 赤松)숲 아래라 조금 어둡다. 입구 계단을 내려가니 정자가 보인다. 정자는 계곡 어깨 넓은 퇴적암 바위 위에 올라앉아 있다. 전형적인 암정(巖亭, 바위 위에 지은 정자), 계정(溪亭, 계곡 옆에 지은 정자)이다.

금계천은 소백산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풍기읍 삼가리-욱금리-금계리-교촌리를 지나 서천(西川)과 만난다. 욱금리 금계저수지-금계리 장생이 마을까지 1.5km 구간을 ‘금선계곡’이라는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었다.

​금계천과 금선계곡은 황준량의 호 금계와 금선대에서 따왔다.

검은색 퇴적암이 이끼와 담쟁이덩굴에 덮여 작은 계곡을 만들고 오래된 소나무(적송)가 하늘을 덮었다. 이름 그대로 ‘굽이치는 비단 물결에 신선이 노니는’ 경치다.

황준량이 죽은 지 218년 후 1781년(정조 5) 풍기군수 이한일이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선생을 기려 지역유지와 후손들과 힘을 합쳐 세웠다. 황준량이 금선정 아래 넓은 바위를 금선대(錦仙臺)라 하고 시를 짓고 자연을 즐기던 곳이다.

황준량은 ‘금선대에서 노닐다’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기이한 바위에 옥 자물쇠가 어지럽게 퍼져있고/사나운 계곡물에 얼음 방울이 튄다/누대에서 한 단지 술을 마음껏 마시니/알록달록 꽃 그림자가 봄 산을 뒤흔든다/황준량의 시 ‘금선대에서 노닐다’

금선정의 가을과 여름

많은 선비도 금계정을 찾아 시를 짓고 아름다운 자연을 즐겼다. 황준량의 스승 퇴계 이황도 풍기군수 시절 ‘신선 될 재주가 없어 삼신산을 못 찾고 구름경치 삼아 시냇물을 마셔보네./얼씨구 풍류 찾아 떠도는 객들이여./여기 자주 와서 세상 시름 씻어보세’라고 시를 남겼다.

​정자 아래 바위 ‘錦仙臺(금선대)’ 글자는 1756년(영조 32) 풍기군수 송징계가 새겼다. 현판은 정자를 세운 4년 뒤 풍기군수 이대영이 성주목사 조윤형의 글을 받아 달았다. 예전에 시를 적은 편액이 많이 걸려 있었는데 모두 없어졌다.

정자는 소박하고 예스러운 멋을 그대로 보여 준다.

금선계곡의 가을과 여름

정면 2칸 측면 2칸, 벽체 없이 사방이 트여있다. 특이한 것은 기둥 길이가 모두 다르다. 암반의 높낮이를 그대로 살렸기 때문이다.

정자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으면 바위에 부서지는 물소리, 새소리에 저절로 힐링 된다. 바위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 가만히 앉아 하늘과 소나무를 배경으로 보는 금선정이 최고의 뷰포인트(view piont)다.

이 감정은 뭘까 ? 발길이 떨어지 않는다.

○ 황준량의 생애

황준량의 본관은 평해, 호는 금계다. 영주시 풍기읍 서부리서 태어났다. 농암 이현보의 손자사위며 퇴계 이황의 아끼던 제자다.

​24세에 문과 급제 후 홍문관박사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중증 실록’과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비밀리에 민정을 파악해 임금에게 보고하는 ‘추생어사’를 거쳐 신녕현감과 단양군수, 성주목사를 지냈다.

조선 명종(18년, 1563년) 봄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풍기로 오던 중 예천에서 47세 아까운 나이로 숨졌다.

​황준량의 죽음을 가장 안타깝게 여긴 사람이 퇴계 이황이었다. 아끼던 제자에 대한 슬프고 가슴 아픈 마음을 제문(祭文)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 슬프다 금계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성주에서 풍기까지 몇 리 되기에 미처 집에 이르지 못했단 말인가. (중략) 실성하여 길게 부르니 물이 쏟아지듯 눈물이 흘러내린다네. 하늘이여! 어찌 이리도 빠르게 이 사람을 빼앗아 가시나이까? 진실인가 꿈결인가 너무 슬퍼 목이 메인다오”(이황의 ‘제문’ 중)

○ 십승지에 북한 피란민과 인삼, 인견

금계마을 입구 표지석

금계정 답사를 마치고 마을로 내려오니 금계1리 표지석과 마을에 관한 안내판이 발길을 사로잡는다.

여기가 풍기인삼을 처음으로 재배한 최초 재배지며, 정감록의 십승지 중 제1승지다. 한국전쟁 때 정감록을 믿고 풍기로 북한(평안북도, 황해도) 피란민들이 와서 살았다. 그들 중 평안북도에서 직물공장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인조 명주(인견)를 짰다. 인견(人絹, art silk)은 인공으로 만든 비단 천을 말한다.

조선시대(1541년) 풍기군수로 주세붕이 인삼재배를 시작한 곳이다. 황해도 개성 사람들에 의해 인삼재배가 활발해지며 인견과 인삼은 영주시의 특산물이 됐다. 참, 역사의 아이러니다.

 

비사벌뉴스 bsb27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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