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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1,300리 누각과 정자 이야기(22회)

기사승인 2024.03.29  14:2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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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청각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산실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실천 독립운동가 11명 배출
글, 사진 오종식 창녕군 문화관광해설사

○ 임청각(臨淸閣)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영남산(映南山) 기슭, 강 언덕 넓은 터에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유명한 임청각이다. 800m쯤 내려가면 반변천의 물길과 만난다. 사람들이 오가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도 오고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임청각은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낸 바 있는 이명이 1515년(중종 10년)에 세웠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의 집이다. 이 집은 영남산(映南山)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명당에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집은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와 여자들의 공간 안채, 남자 노비들의 바깥 행랑채, 여자 노비들의 안 행랑채 건물이 남녀와 계급별로 구분되어 있다.
사람뿐 아니라 안채와 바깥채 건물도 2.5m 높이 차이가 있어 건물의 높낮이 질서도 분명하다.

임청각이라는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등장하는 "동쪽 언덕에 올라가서 휘파람을 길게 불고, 맑은 물가에서 시를 지으리라."(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등동고이서소, 임청류이부시)라는 시구에서 '임(臨)'자와 '청(淸)'자를 따왔다.

귀래정과 임청각 등 정자 이름을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따 온걸 보면 고성이씨들은 도연명의 삶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임청각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살림집 중 가장 오래된 집이다.
안동에 고성이씨가 정착하게 된 것은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 1368 ∼1429)의 여섯째 아들인 이증 때다.
조선 성종 때 진해 현감과 영산 현감을 지낸 이증(李增, 1419~1480)은 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여기에 자리 잡아 입향조가 되었다. 임청각은 이증의 셋째 아들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 세웠다
임청각은 영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지어진 전통한옥이다. 
99칸 기와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 별채는 물론 아담한 별당(군자정)과 정원까지 조성된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상류 주택이다.
임청각은 비운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현장이다. 일제가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기 위해 임청각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임청각을 ‘불령선인이 다수 출생한 집’이라 하고, 독립투사였던 이상룡 선생에 보복하기 위해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 건물을 철거한 뒤, 마당에 중앙선 철로를 관통시켰다.
원래 99칸 집이 강제 철거되고, 대문도 사라졌다. 현재는 면에 50여 칸이 남아 있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독립운동을 한 집안이다.
그래서 그런지 1941년 중앙선 철길을 낼 때 임청각을 가로질러 철길을 뚫었다. 독립운동의 ​혈맥을 끊기 위해 집 한가운데 철길을 냈다. 
99칸으로 이뤄진 대저택이었지만 집을 관통하는 철길 때문에 지금은 50칸만 남았다.
2020년 12월 안동역사가 외각으로 이전하며 철길이 철거되어 주변 환경이 좋아졌으나 집 앞 도로에는 여전히 차가 많아 한적한 옛 모습은 아니다. 

잘 정돈된 넓고 긴 정원에는 모과, 무궁화, 배롱나무, 원추리, 단풍나무, 음나무, 수국, 벽오동 등이 무심한 듯 강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임청각을 보고 나면 800m 떨어진 국보 ‘법흥사지 7층 전탑’과 ‘고성이 씨 탑동 종택도’ 꼭 답사하길 추천한다.

○ 노블리스 오블리쥬 실천한 독립운동의 산실
당나라 유우석의 누실명에 ‘산이 높아 명산이 아니고 신선이 살아야 명산이며, 집이 커야 명문가가 아니고 군자의 길을 가는 선비가 살아야 명문가다.’라는 말이 있다.
임청각은 고색창연한 기와집도 아름답지만, 이곳에서 군자의 길을 살다간 사람들의 향기가 더더욱 아름답다. 인향만리(人香萬里)라 했다. 그 향기가 지금도 임청각을 찾는 사람들에게 진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 후손 이상룡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내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독립투쟁의 토대를 마련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이상룡 선생의 생가다.

석주 이상룡(李相龍, 1858~ 1932) 선생을 비롯하여 선생의 아들, 손자 등 독립운동가 11명을 배출하는 등 3대에 걸쳐서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나라가 망하자 석주는 조상의 위패를 없애고 노비를 해산시켜 근대사회로 길을 열었다. 독립전쟁만이 나라를 되찾을 길임을 밝히고 많은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우려고 나섰다.
이상룡 선생은 1911년 1월 많은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자금을 가지고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망명 직전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라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만주에 도착하여 독립운동기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고,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을 맡아 독립운동을 했다. 
그 신흥무관학교에서 3,500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1913년에 독립운동자금이 바닥났다. 이상룡 선생은 아들 이준형에게 말했다. “국내로 들어가 임청각을 처분해서라도 군자금을 마련하라”고... 
국내로 들어온 이준형이 집을 팔지 못했다. 고성이씨 집안에서 독립운동 자금 500원을 만들어 주었다.
실로 대단한 집안이다.

○ 군자정(君子亭)
임청각 오른쪽에 별당형 군자정이 있다. 현판이 안에 걸려 있어 밖에서 보이지 않는 게 아쉽다. 함양 회림동계곡 군자정과 영주 군자정과 같은 이름이다.
임청각 현판은 퇴계 이황의 글씨고, 군자정 현판은 고동(古東) 이익회(李翊會) 선생의 글씨다.
대청인 군자정에는 임청각과 군자정 현판을 비롯하여 농암 이현보, 제봉 고경명, 백사 윤훤, 송강 조사수, 파서 이집두, 석주 이상룡의 시가 걸려 있다. 몇장은 도둑이 훔쳐갔다.
군자정은 임청각 사랑채로 별당형식의 정자 건물이다. 옆에 연못이 있고 정자에 앉아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임청각에서 강풍경이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이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임청각의 인물 
이상룡 선생은 만주로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이는 지금 나의 이 길을 일컬어 난리를 피하여 삶을 도모하려는 것이라 하니, 내 한 몸 온전히 하고 집안을 보전하려 한다면 고향이 객지보다 나을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곳은 양전옥답의 곡식과 고대광실에 따뜻한 이불이 있기에...”

 

임청각에 살다간 사람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가진 자의 도덕성을 몸소 실천한 집안이다.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11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이뿐만 아니라, 애국 시인 이육사는 이상룡 선생의 며느리인 이중숙 여사의 친정 종손자며 어릴 때부터 임청각에 드나들며 함께 지내기도 했다.

임청각의 사위들도 독립유공자 들이었다. 

비사벌뉴스 bsb27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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